살빼는 소프라노… 목소리는 안줄어들까

살빼는 소프라노… 목소리는 안줄어들까
오페라 가수도 열심히 다이어트해야 하는 세상입니다. 미국의 소프라노 데보라 보이트(Voigt)가 2년 여 만에 45㎏ 가까이 감량을 하고 무대로 복귀했습니다. 정확한 몸무게 수치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성악가 스스로 "옷 사이즈가 절반으로 줄었다"고 말한 것으로 미뤄서, 위 절제 수술의 효과를 톡톡히 본 것으로 보입니다.

20세기 최고의 디바(diva) 마리아 칼라스(Callas)도 영화 배우 오드리 헵번을 벤치마킹(bench-marking)하기 위해 30㎏ 가까이 감량한 적이 있으니, 성악가의 다이어트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체중 감량에는 다소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습니다. 보이트는 지난 2004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에서 아리아드네 역으로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 출연 예정이었습니다.
▲ 소프라노 데보라 보이트가 체중 감량을 하기 전의 모습(왼쪽)과 45㎏ 가량 감량을 한 뒤 지난 1월 미국 뉴욕 링컨센터에서 노래하는 모습. 데보라 보이트 홈페이지(www.deborahvoigt.com)
1991년 보스턴에서 이 역으로 화려하게 데뷔하며 성악가로서 본격적인 경력을 쌓았기에 보이트 자신에게도 무척 소중한 배역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연출가 크리스토프 로이(Loy)는 '검정 칵테일 드레스가 보이트에게 맞지 않는다'며 배역 교체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보이트는 인터뷰에서 "내가 평생 뚱뚱했다는 걸 생각하면 무척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고 회상합니다.

결국 보이트는 "오페라 극장 문제가 아니라 내 무릎이 아팠기에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숨이 찼고,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내 몸이 의자에 맞을지 걱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첫 달에만 10㎏ 가까이 줄인 그는 체중 감량에 성공한 뒤 활발하게 활동을 재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다이어트 사건은 고고하고 도도하게 보이던 클래식 음악계에도 한치 빈틈 없이 시장 논리가 적용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1990년대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Gheorghiu)에 이어 2000년대의 안나 네트렙코(Netrebko)까지 노래는 물론, 젊고 예쁘고 연기력까지 뛰어나야 인정 받는 세상이 온 것입니다. 네트렙코는 아예 마릴린 먼로를 연상시키는 흰색 원피스를 입고 수영장에서 드보르자크의 오페라 《루살카》 가운데 아리아 〈달의 노래〉를 뮤직 비디오로 촬영해 화제를 뿌렸지요. 콧대 높기만 하던 오페라도 날이 갈수록 '오디오'에서 '비디오'로 그 중심이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체중 감량 이전에도 보이트는 풍부하면서도 선 굵은 목소리로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독일 오페라에서 정평이 나있던 정상급 드라마틱 소프라노입니다. 최근 같은 배역으로 같은 극장에 복귀하게 됐으니, 결과적으로는 '무승부'인 셈입니다. 하지만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사는' 것이 오페라의 매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씁쓸하기 그지 없는 풍경이기도 합니다.

by goodki01 | 2008/12/17 22:46 | 이것저것 기웃기웃 | 트랙백 | 덧글(1)

베토벤 '10번 교향곡' 있나? 없나?

제자 "죽기전에 스케치 남겼다" 주장
학자들 "초고에는 이르지 못해" 반박
'9번 교향곡'은 일종의 징크스로 남아
▲ 2003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213만 파운드(당시 환율로 약 41억원)에 낙찰된 9번 교향곡 악보 초고. / 블룸버그
'10번 교향곡'은 스페인의 소설가 조셉 젤리네크가 악성(樂聖) 베토벤의 삶을 팩션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장편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음악학 교수 다니엘은 베토벤이 10번 교향곡을 남겼으리라 믿고 은폐된 악보를 찾아 나선다.
베토벤(Beethoven·1770~1827)의 공식적인 마지막 교향곡은 9번 '합창'이다. 그렇다면 베토벤의 미완성 교향곡 10번은 존재할까. 소설은 명쾌하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 명료하지 않다.

베토벤이 사망 직전 쓴 편지에 "내 책상에 이미 스케치된 것이 있으니 그것들로 새 교향곡 하나, 혹은 서곡이나 협회가 좋아할 만한 다른 작품을 쓸 수 있도록 해주기"를 간청하는 구절이 있다. 1825년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포켓용 스케치북에도 교향곡 10번의 악상을 담은 스케치가 있다.

'10번 교향곡' 논쟁의 불씨를 마련한 주인공은 베토벤의 조수이자 제자로 유명한 안톤 신들러(Schindler ·1795~1864)다. 그가 쓴 스승의 전기는 수없이 번역되고 개정판을 거듭하면서 19세기 베토벤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는 베토벤이 타계한 뒤 스승의 집에서 중요한 자료들을 가져가 1845년 프로이센 왕에게 팔고 거액을 챙긴 것으로 악명이 높다. 신들러는 베토벤의 대화첩에서 자신이 등장하는 대목을 조작하거나 위조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어쨌든 신들러는 1844년 베토벤이 사망 전 10번 교향곡을 위한 스케치를 남겼다고 주장했다. 베토벤의 동료이자 또 다른 조수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카를 홀츠(Holz)도 '미완성 10번 교향곡'에 대해 "베토벤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고 부드러운 도입부에 이어 힘찬 알레그로로 이어진다"고 말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악성 베토벤이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감안하면 10번 교향곡의 여부는 저명 인사의 '친자 확인 소송'처럼 민감한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1970~80년대에 들어서야 학문적 수준에서 본격적 재조명이 이뤄졌다.

논쟁의 불씨를 되살린 학자는 베토벤 연구가이며 음악학자인 배리 쿠퍼(Cooper)다. 그는 베토벤이 남긴 스케치 등을 바탕으로 "1824년 '합창' 교향곡을 완성하기 전인 1822년부터 교향곡 10번을 위한 구상에 들어갔고 사망하기 2년 전인 1825년 10월에 마지막 스케치를 남겼다"고 주장했다.

쿠퍼는 자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베토벤이 남긴 스케치에서 추려내서 5년간 재구성 작업 끝에 1988년 '10번 교향곡'의 1악장을 두 가지 버전으로 발표했다. 쿠퍼가 손댄 베토벤의 '미완성 10번 교향곡'은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각각 녹음했다.

반면 로버트 윈터스 같은 학자들은 "베토벤이 9번 교향곡을 완성한 뒤 실제 10번 교향곡에 착수했다고 해도, 연속성 있는 초고(草稿)에는 이르지 못했다"며 반박하고 있다.
서양 음악사에서 작곡가의 죽음으로 미완성으로 남은 작품은 적지 않다. 바흐의 '푸가의 기법', 모차르트의 '레퀴엠', 푸치니의 '투란도트', 알반 베르크의 '룰루' 등이 대표적이다. 모차르트와 푸치니의 작품은 제자들이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토벤 이후 서양 음악사에서 '9번 교향곡'은 일종의 징크스가 됐다. 슈베르트, 드보르자크, 말러, 브루크너 같은 작곡가들이 교향곡 9번을 넘기지 못하고 타계한 것이다.

말러의 경우에도 미완성 유고를 바탕으로 '10번 교향곡'을 완성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특히 말러의 교향곡 10번은 크셰넥을 비롯해 데릴 쿡, 카펜터, 마제티 등 여러 작곡가들이 완성에 도전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고 있는 지휘자 사이먼 래틀(Rattle)은 말러 교향곡 10번의 완성본에 누구보다 애착을 지니고 연주하고 있다.

by goodki01 | 2008/12/15 22:38 | 이것저것 기웃기웃 | 트랙백 | 덧글(1)

탄호이저

현실과 이상 사이… 방황하는 영혼을 위해
여인의 희생으로 구원받는 음유시인
序曲·순례자의 합창… 귀에 익은 명곡 즐비
박종호·오페라 평론가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 두 세상 사이에서 방황하기 마련이다. 이상(理想)은 드높지만 현실은 미약하며, 영혼은 고결하지만 육신은 비루한 욕망을 추구한다. 인간사의 근본적인 딜레마일 것이다.

이렇게 두 세계에서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너무나도 처절하게 그려낸 오페라가 바로 바그너의 명작 '탄호이저'다.

이 오페라의 메시지는 장중하지만, 그 내용은 바그너의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편이다. 대부분의 바그너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여성의 희생에 의한 남성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진부할 것 같지만, 막상 극을 접하고 보면 그 웅변은 의외로 강렬하고 감동적이다. 음악은 아름다운 한편, 이미지가 뚜렷하다. 이 오페라의 배경은 대조적인 두 세계이다. 하나는 순결과 순정(純情)의 세계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환락과 육욕(肉慾)의 세계다. 그리고 각각 한 명씩의 여성이 두 세계를 대표하는데, 이름은 각각 엘리자베트와 베누스(비너스)다.

▲ 독일 음악 페스티벌에서 무대에 오른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의 한 장면. /Getty Images 멀티비츠

그래서 두 여인의 역을 맡은 소프라노는 경쟁하듯이 전혀 다른 두 세계를 보여주게 되는데, 이 점이 이 오페라의 큰 매력이다. 바그너가 대조하려고 했던 두 세계가 각각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회를 상징한다고 보는 학자가 있는 반면, 융성하였지만 부패한 프랑스와 가난하지만 정신성이 살아있는 독일로 본 견해도 있었다. 두 세계는 또한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가진 자와 없는 자, 지배층과 피지배층, 또한 노(勞)와 사(使)가 될 수도 있다. 또 유럽과 제3세계, 보수파와 개혁파, 현실과 이상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주인공 탄호이저는 두 세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데, 그것은 바그너의 모습이자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중세 독일의 기사이자 음유시인인 탄호이저는 튀링겐 지방 영주의 조카딸인 엘리자베트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우연히 베누스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베누스와 꿈같은 환락의 시간을 보낸다. 탄호이저는 자신의 원래 세계로 돌아오지만, 음유시인(吟遊詩人)들이 모여서 시와 노래를 겨루는 경연(競演)대회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자기가 맛보았던 육욕의 세계를 찬미하고 만다. 이에 사람들은 탄호이저가 금단(禁斷)의 세계에 갔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는 큰 벌을 받게 된다. 사면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황의 용서를 받는 일인데, 교황조차 그를 외면한다.

하지만 탄호이저의 영혼은 결국 구원을 받는데, 그것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엘리자베트의 희생, 즉 그녀의 죽음에 의해서이다.

이 오페라의 내용보다도 더 큰 매력은 음악이다. 무척 유명한 서곡(序曲)을 시작으로 시종 바그너의 유려한 관현악이 듣는 이를 감동의 세계로 이끈다. 서곡 외에도 '베누스베르크 음악'과 '바카날레' 그리고 '입당행진곡' 등의 관현악곡이 잘 알려져 있다. 아리아 중에서도 엘리자베트의 '노래의 전당이여'와 '엘리자베트의 기도', 탄호이저가 부르는 '베누스 찬가'와 '로마 이야기', 친구 볼프람이 부르는 '저녁별의 노래', 그리고 유명한 합창곡인 '순례자의 합창' 등 명곡이 즐비하다.



추천 음반

CD=솔티 판 (1970년, 데카)

르네 콜로(탄호이저), 헬가 데르네쉬(엘리자베트), 크리스타 루드비히(베누스), 빅터 브라운(볼프람) /지휘: 게오르그 솔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악우협회 합창단

추천 이유: 최고의 탄호이저 음반의 하나로서 콜로와 루드비히의 가창이 대단하다. 빈 필의 연주력과 전성기 데카 기술진의 테크닉이 한데 어울려 최고의 음향을 만들어 냈다.

DVD=바이에른 판 (1994년) 뮌헨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극장 실황

르네 콜로(탄호이저), 나딘 세쿤드(엘리자베트), 발트라우트 마이어(베누스), 베른트 바이클(볼프람) /지휘: 주빈 메타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 합창단 /연출: 데이비드 올든 /무대: 로니 토렌

추천 이유: 올든의 연출은 뮌헨의 대형 무대에서 뛰어난 시각 효과를 보이는데, 서곡 부분에서 극의 상징적 장면들을 모두 보여주면서 관객을 압도한다. 두 여주인공은 각각 청순하고 요염한 모습을 성공적으로 표현해 낸다.

by goodki01 | 2008/12/08 21:46 | 이것저것 기웃기웃 | 트랙백 | 덧글(2)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

절대 고독… 그것이 예술의 시작이었다
헌터 드로호조스카필프 지음|이화경 옮김|민음사|702쪽
사진=민음사 제공
1931년 봄, 실의(失意)와 고독이 마흔 네 살의 성공한 화가 조지아 오키프(O’Keeffe)를 덮쳤다. 우선 남동생이 죽었다. 대공황 와중이었다. 좌파 지식인들이 오키프의 관능적인 꽃 그림을 ‘세월 모르는 풍월’이라고 공격했다. 스물 세 살 연상의 남편 앨프레드 스티글리츠(Stieglitz·1864~1946)는 세계적인 사진가이자 부유한 화상(畵商)이었다. 그는 자기보다 마흔 살 어린 갑부 유부녀에게 푹 빠져 있었다.

이 책은 미국 화가 오키프(1887~1986)의 전기다. 그녀는 한평생 꽃과 조개와 사막을 그렸고 생전에나 사후에나 한결같이 대중과 평단과 시장의 경배를 받았다. 59세에 여성작가 최초로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회고전을 열었다. 사후 15년이 흐른 2001년에는 유화 〈붉은 아네모네와 칼라〉로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여성 최고기록(620만 달러)을 세웠다.

이 화려한 생애의 이면을 저자는 간결하고 냉정한 문장으로 뒤따라간다. 오키프는 모순에 찬 인생을 살았다. 그녀는 혁명으로 몰락한 헝가리 귀족과 기근을 피해 미국에 이민간 아일랜드 농민의 결합으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잡지 삽화가, 시골학교 임시 교사 등으로 연명했다.

그녀는 만 29세에 또래 애인을 버리고 애인의 스승이자 상사인 스티글리츠의 정부가 됐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를 위해 조강지처를 버렸다. 그는 도처에서 오키프와 밀애를 즐기고 정사로 나른해진 오키프의 육체를 몇 시간씩 공들여 촬영했다. 몇 년 뒤 그는 더 젊은 여자에게 홀렸다. 스티글리츠가 새 여자의 가슴을 쓰다듬는 동안, 중년의 오키프는 가슴에 생긴 종양을 제거하러 병원에 갔다. 훗날 스티글리츠가 숨지자, 오키프는 남편의 유골을 시골집 호숫가에 묻었고 어디다 묻었는지 연적과 시댁 식구들에게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고독을 곱씹으면서도, 오키프는 차근차근 생애 최고의 걸작들을 생산해냈다. 그녀는 화가보다 ‘스티글리츠의 모델’로 먼저 유명해졌다. 남자들은 그녀를 “예쁜 그림을 그리는 예쁜 여자”라고 얕봤다. 세간이 빈정대도 오키프는 자기 길을 고집했다. 그녀는 “나는 내 작품이 예쁘다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고 했다. “‘예쁜 것’을 버리는 대신, ‘예쁘다’는 말을 열등한 것의 범주에 넣어버리는 남자들의 억측을 전복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321쪽).

오키프는 뉴멕시코주(州)의 사막에서 후반생을 보냈다. 동틀 때 일어나 온종일 부지런히 작업하곤 했다. 노환으로 눈이 침침해진 뒤에도 최후까지 유화를 그렸고, 시력을 완전히 잃자 도자기를 빚었다. 자식이 없는 오키프는 전재산(6500만 달러)을 60세 연하의 비서에게 남겼다. 그는 오키프를 이렇게 회고한다.

“사람들은 오키프를 고흐, 고갱과 비교한다. 그러나 그 두 남자에게 내재된 파괴적인 성향을 그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개에게 물 주는 걸 잊지 마라. 정원을 일궈라. 세금을 내라’고 했다. 그녀의 서랍은 언제나 정리돼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언제나 팬티스타킹을 신었다.” (689쪽)

by goodki01 | 2008/12/07 23:46 | 이것저것 기웃기웃 | 트랙백 | 덧글(2)

세기를 뛰어넘은 '문제작' 봄의 제전

걸작의 첫인상은 너무 추했다
▲ 《봄의 제전》을 모티브로 한 영국 마이클 클락 컴퍼니의 무용《으으으음(Mmm…)》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제공
20세기 최초의 '음악 혁명'이 발발한 순간은 1913년 5월 29일 오후 8시45분, 장소는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극장입니다. 음악학자 토머스 포리스트 켈리는 책 《음악의 첫날밤》(황금가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관객들은 첫 2분 동안 조용하게 있었다. 그러다가 야유 소리가 꼭대기 좌석에서 터져 나왔다. 좀 있으니 낮은 층 객석에서도 들려왔다. 사람들은 주먹이든 단장(短杖)이든 손에 잡히는 건 무엇이든 쥐고서 옆 사람 머리 위로 흔들어댔다. 분노는 처음에 무용수들에게, 그 다음에는 오케스트라에 집중됐다. 공연이 끝날 무렵 경관들이 출동했다. 작곡가는 무대 뒤쪽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파리 거리를 쓸쓸하게 거닐었다."

밤 거리를 배회한 작곡가는 스트라빈스키(Stravinsky), 이 날의 문제작은 발레 《봄의 제전》입니다. 태양신에게 바치는 제물(祭物)로 한 처녀를 선택하고 제단 앞에서 태고의 의식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이 이 발레의 내용입니다.

늘씬한 몸매를 살려주는 발레 의상 대신, 러시아 전통 의상으로 온몸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슬라브적 제의를 펼치는 모습은 당시 관객들의 눈에 생경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입가에 손을 대고 천장 대신 바닥을 쳐다보며 춤추는 무용수들에게 "치통에 걸렸으면 치과에나 가라"고 고함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봄의 제전》에 대한 반감은 꽤 오랫동안 지속됐습니다. 올해 탄생 100년을 맞은 미국의 장수 작곡가 엘리엇 카터(Carter)는 19세 때인 1927년 뉴욕 카네기 홀에서 열린 《봄의 제전》 공연 당시 "관객의 절반은 걸어나갔다. 아버지도 공연이 끝난 뒤 '미친 녀석이나 그런 작품을 쓸 것'이라고 하셨다"고 기억합니다. 하지만 카터가 작곡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 가운데 하나도 바로 《봄의 제전》이고, 20세기 최고의 '문제작'이 된 지금은 영화와 음악, 무용 등 장르를 넘나들며 크로스오버(crossover)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2003년 타계한 독일의 감독 올리버 헤르만(Herrmann)은 원시 부족의 제의를 현대 도시로 옮겨와 무기력증과 섹스 중독, 결벽증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이 주술적 전례를 통해 치유 받는 과정을 38분짜리 무성 영화 《봄의 제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타계한 이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베를린 필(지휘 사이먼 래틀)의 라이브 연주에 맞춰 상영됐습니다. '청소년 관람 불가 영상'이 '청소년 권장 음악'이 되기도 합니다. 래틀이 베를린 필의 청소년 음악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베를린과 뉴욕의 십대들에게 맘껏 춤출 기회를 주었던 음악도 바로 《봄의 제전》입니다.

지난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안은미 컴퍼니와 마이클 클락 컴퍼니 등 한국영국의 무용단도 공교롭게 《봄의 제전》을 각각 도전 대상으로 선택했습니다. 90여 년 전에 관객들을 질리게 했던 작품이 세대가 흐르면서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빚어내고,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고취시키고 있으니 여전히 '문제작'은 문제작인 셈입니다. 그날 밤 파리의 밤거리를 쓸쓸하게 걸었던 스트라빈스키도 지금은 후배 예술가들의 애정 공세에 웃음 짓고 있겠지요.
▲ 안은미컴퍼니의《봄의제전》.

by goodki01 | 2008/12/03 22:25 | 이것저것 기웃기웃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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